수필

손가락론

yullee kim 2015. 3. 20. 19:57

 

손가락

 

- 둘째와 넷째의 이야기 -




네일샵에 갔었어. 참 편한 세상이야. 거기 가면 한 시간 정도 손을 맡겨놓고 느긋하게 쉬지. 풋풋한 네일리스트들이 뻑뻑한 내 손을 얼마나 정성스레 매만져 주는지 몰라. 먼저, 사포막대로 길이와 모양을 적당하게 다듬어서 따뜻한 물에 손끝을 담궈 줘. 뒤이어 꼬마니퍼가 등장해. 작은 사슴벌레 같은 녀석이 손톱가장자리 군살들을 야금야금 먹어치우는데 그 모양이 또 얼마나 앙증맞고 귀여운지. 그다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팀타올 맛사지, 온 몸이 따뜻해지면서 피로가 노골노골 녹아나가. 맞아, 어쩌면 이 느낌 때문에 돈 들여 시간 들여 이곳에 오는지도 모르겠어. 어찌되었던 드디어 화룡점정, 칼라를 입히는 시간이 왔어. 손을 만지는 내내 이런저런 얘기를 속닥속닥하던 네일리스트가 내 손가락을 가리키며 말했어.

“언니, 포인트 칼라 집게손가락에 해 드려요?”

나는 대번에 도리질을 했지. 집게손가락이라니 그것도 오른손집게손가락이라니, 절대 안 될 일이야. 손가락 열 개 중에서 이 아이가 제일 못 생겼는데, 그것도 그냥 못 생긴 게 아니라 끝마디가 삐뚤어졌는데 거기에 블링블링한 포인트칼라를 하자고. 안 될 일이지.

하지만 이내 실소를 하고 말았어. 참 너무하는구나. 이 아이가 제일 고생한 아이인데, 그래서 끝마디가 삐뚤어지기까지 했는데 주인인 내가 그걸 몰라주네. 처음 수저 잡는 것부터 시작해서 연필 잡느라 수십 년을 봉사하고, 또 한때 뜨개질에 빠졌을 때 가느다란 쇠꼬챙이바늘을 지탱하느라 살이 파이도록 참아왔던 충직한 아이인데. 그뿐이면 말도 안하겠다. 이 나이 먹도록 손으로 하는 일의 온갖 수고를 도맡아 해 왔건만, 이제는 골병들어 모양새 뒤틀렸다 타박을 하니 참 팔자치고는 가련한 팔자구나 하고.


꼭 엄마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산 중턱 우리 집까지 기어코 오셨지. 그때 엄마는 까맣게 탄 얼굴로 집 뒤편 밭에서 괭이질을 하고 계셨더랬어. 선생님 뒤에는 반 친구들이 또 우르르.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엄마는 마루에 그대로 앉아 계셨어. 한참동안이나……. 다음날,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었어. 할머니엄마를 뒀다고 말이야. 한동안 나는 엄마가 부끄럽고 원망스러웠어. 돌아보면 내 젊은 날도 그래. 우리 세대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내었는지, 다시 살라면 절대 못 살 것 같은 날들이지. 그리고 그 치열함 속에 쿡쿡 박혀있는 옹이 자국들. 나는 이 모두가 삐뚤어진 손가락 같은 거야. 수고한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결코 자랑스럽지도 않으니 대체 이게 무슨 심사일까.

참, 나는 그때도 손가락을 꼭꼭 막고 다녔어. 열손가락 끝마디 마다 바람이 스며드는 것 같았거든. 그때는 몰랐어. 그 바람이 무엇이었는지……. 시간이 많이 지나고서야 알았네. 그건 강을 사이에 두고 떠올랐던 닻별, 그 닻별 같은 이의 파란 옷자락이 서걱이던 저릿한 바람이었고, 어둡고 휑한 *서덜을 걸을 때 귓가에서 올올이 찢어지던 새밭바람이었음을. 어찌 그리 손끝이 시리던지. 뭘 몰랐던 그 즈음의 나는 엉뚱하게도 사람은, 특히 여자는 손끝이 야물어야 한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지. 빨간 꽃잎 모양 손끝을 꼭꼭 막으면서.


하지만 요즘은 순전히 미용 목적으로 네일샵엘 가. 이 나이가 되니까 손이 저 먼저 미워지거든. 유연성이 떨어지고 마디가 굵어지는 것이 영 마뜩찮아. 게다가 주름은 왜 또 손부터 오는지,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 갈퀴손 같고 매발톱 같아 너무 속상하다니까.

선반에서 알록달록한 메니큐어병을 골라온 네일리스트가 또 묻네. 어느 손가락에 포인트 칼라를 할 거냐고. 나는 주저 없이 내밀었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아니 이게 무슨’, 알아 나도 알아. 그렇지만 딱 적당하잖아. 엄지손가락처럼 뭉툭하니 무식하게 생기지도 않았고 가운데손가락처럼 멋없이 길기만 한 것도 아니고, 봐주기 민망한 정도로 약해빠진 새끼손가락에는 비할 바가 아니지. 길고 짧은 것 사이에서 적당한 길이, 야들야들 고운 모양새로 우아하게 자리하고 있잖아. 고운 색을 차지할 자격이 충분하지.

뭐, 그저 먹는다 생각할 수도 있어. 그런데 약 오르게도 그게 다가 아니야. 재운은 또 얼마나 좋은지 온갖 금은보화는 다 제 것이네. 풀꽃반지부터 시작해서 멋내기반지, 약혼반지 그리고 결혼반지까지 값나가는 건 모두 제 차지라니까. 참나 이름조차 무명지라 신비롭게 불리질 않나, 비장한 일이 생겨나면 또 주인공에 낙점되니 그 좋은 팔자를 뭘 어쩌겠어. 안중근의사가 혈서를 쓸 때 왼손무명지를 잘랐네. 떡하니 손도장까지 찍어놨으니 천년만년 완벽한 증빙이 되지. 보는 사람마다 잘린 무명지를 보며 얼마나 비감해 하는지 몰라.

불평할 일은 아니야. 사노라면 가끔씩 보잖아. 특별한 이유 없이 팔자가 늘어지게 좋은 부류들을. 뭐 시쳇말로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지 뭘 어쨌는지. 손가락이라고 아니 그럴까.


내 큰아이는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비틀어졌어. 어릴 때 플루트를 시작하면서 비정상적인 손자세로 키를 눌러야 했던지라 결국 기형적으로 변하고 말았지. 그런데 아이는 결코 그 손가락을 부끄러워하거나 감추려 하지 않아. 외려 훈장처럼 자랑스러워한다니까. 삐뚤한 손가락으로 호롱호롱 돌돌돌 은피리를 잘도 불면서.

왜 나는 삐뚤어진 손가락에 고운 네일칼라 하나 못 입혀 주는 걸까. 윤아무개 시인이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 이라 일찌감치 말했던 그런 부끄러움일까. 삐뚠 모든 것에 보내는 세상의 매운 눈에 가슴이 먹먹했던 탓일까. 솔직히 아니라고 할 자신은 없어. 하지만 다는 아냐, 더 많은 건 집게손가락의 마음, 제 부끄러움을 드러내지 않음을 고마워하는 그 헤윰을 헤아림이야. 그러니 나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거야. 삐뚤어진 손가락을 부끄러워하는 내 마음을.

맞아, 인류 최고의 철학자인 싯다르타조차 고행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더라고. 피골이 상접하도록 치열하게 자신을 괴롭혔건만 그게 오히려 진리에 다가가는 것을 막는다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잖아. 몇 천 년이 지나도록 사람들이 여전히 신뢰하는 싯다르타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게 맞는 게 분명해. 그러니 지난함 탓에 마디가 삐뚤어졌다하여 집게손가락을 과대우 할 필요는 없지. 물론 이건 어느 손가락을 더 사랑하거나 혹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런 문제는 아니야. 적절함의 문제이지. 전체를 위한 적절함 말이야.


어쨌든 이쁜 넷째손가락은 더 이뻐졌어. 메탈반짝이를 톡톡 뿌린 뒤 또 다시 은색칼라를 덧 입혀서 정말이지 블링블링해졌거든. 고운 옷은 고운 사람이 입어야 더 이뻐 보이는 게 사실이니 어쩌겠어. 게다가 집게손가락은 앙증스런 주홍색 끝동을 물고 그걸로 충분히 기쁜 모양이야. 또 제 부끄러움이 과하게 드러나지 않아 오히려 다행이라 말하니 이만하면 아주 잘 된 것 아닐까.

그런데 이를 어째, 손끝으로 뭔가 자꾸 파고들어. 내가 네일샵에 오는 것이 고와지려는 그 목적만은 꼭 아닌 것 같아. 그래, 그런 것 같아.


* 서덜 : 냇가나 강가의 돌이 많은 곳

 

2015 에세이문학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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