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렁다리
일요일 오후, 달리는 차 안. 여자는 바쁘다. 운전하랴, 재잘대랴, 와싹와싹 노란 단감을 씹어대랴,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랴 여간 바쁜 게 아니다. 남자는 등받이에 기댄 채 반쯤 눈을 감고 있다. 저 여자…… 불안한 모양이다. 울증 증세를 보이고 있네. 정신의 빈틈을 만들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구나. 남자는 등받이를 낮춰서 반쯤 눕는다. 팔짱을 끼고 눈을 감는다. 창밖의 가을은 혼자 떠돈다. 눈을 감은 남자도 가을을 보지 않고,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여자도 가을을 보아주지 않는다.
애타는 가을은 혼자 물든다. 열심히 물든다. 가능한 모든 것에 최대한 스며들고 있다. 산에, 들에, 하늘에, 그리고 길가의 나무 하나 마다에 제 혼을 입히고 있다. 팔랑, 화르락 나뭇잎이 날아 내린다. 어미와 헤어지는 그들, 바람옷을 입고 먼 길을 떠나는 그들의 빨갛고 노란 얼굴. 가을이…… 꽉 찼다.
우금 가에 몸 얇은 억새가 피어올랐다. 은빛으로 피어올랐다. 아직 윤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한참은 더 가야 겨울에 닿을 모양인데……. 무엇으로 마음이 꽉 차 버린 여자의 머리에도 한 올, 두 올 흰 것이 보인다. 마음이 꽉 찬 여자를 보아내느라 남자의 마음도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다.
휴게소에 들린다. 커피를 산다. 까맣게 맑은 따뜻한 커피를 한 잔만 산다. 핫도그도 하나만 산다. 여자가 한 모금 마신 커피를 남자에게 건네주며 웃는다. 남자도 한 입 베어 문 핫도그를 여자 손에 쥐어준다.
점심에서 저녁 사이 그 중간쯤, 산언저리 논길에 차를 멈춘다. 제 한 생을 다 산 나락들이 바닥에 몸을 뉘이고 있다. 노르끼리하게 물든 가을 햇살 아래 사부작사부작 낮은 소리로 무슨 말들을 하고 있다. 평생지기들, 마지막 순간까지 같이 누워 머리를 맞댄 그들이다. 그러니 할 말도 많다. 손 붙잡고 바람 한줄기라도 더 보고 싶은 그들이다. 그런 나락들의 가슴 위로 천년의 돌탑 두 개, 길게 늘어져 내린다.
산모롱이 아래 쌍탑만 우뚝 선 폐사지. 경주 감은사지, 십여 년 전에도 다녀갔던 곳이다. 여자는 그때처럼 까르르 웃으며 탑을 향해 뛰어간다. 남자는 터벅터벅 걷는다. 여자의 긴 겉옷이 펄럭인다. 저 여자의 옷자락. 벽돌빛 붉은색, 가을빛이 닿았구나. 여자는 여전하다. 출입금지 울타리를 넘어 기어코 탑신까지 가는 것도 여전하다. 탑을 등에 진 여자는 생각한다. 어찌 이리 가벼울까. 천년 세월도 이렇게 가볍구나.
동탑과 수인사를 튼 여자가 서탑에게 또 한참 안부를 묻는다. 장대석만 남은 금당자리를 맴돈다. 탑과 나이가 얼추 비슷해 보이는 느티에게 달려가 당산 노릇은 할 만하냐 묻는다. 소원을 비는 여인네들의 손은 다 잡아 주었냐 재차 물어본다.
여자의 공무가 바쁜 사이, 남자는 시골할미와 모사를 벌이고 있다. 까만 촌할미는 남자를 붙든 것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내일이면 물러서 못 먹을 주홍빛 감을 처리하게 되어 못내 흐뭇하다. 뛰어온 여자가 말린다. 냉장고에 단감이 가득 들어 있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여자에게 감을 안겨줄 생각이다. 저 여자는 운전하는 내내 노란단감을 오물오물 잘도 베어 먹었었지.
천년살이와의 만남을 뒤로하고 억만년살이에게로 간다. 십여 분을 달려 읍촌항의 주상절리 군락에 닿는다. 그 사이 날은 기울었다. 가까스로 남은 빛이 언덕 위에 버티고 있다. 가파른 절벽을 따라 이어진 목책길. 여자는 남자의 손을 잡고 걷는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동안 걷자 눈앞에 보이는 출렁다리, 아찔하다. 다리 아래로 까마득한 절벽이 보이고 파도까지 몰려온다. 남자는 다리를 건너가기 시작한다. 여자는 주춤주춤 망설인다. 이 다리를 잘 건너갈 수 있을까. 겨우 발을 밀어 넣는다. 눈을 딱 감고 걸음을 재게 옮긴다. 서너 걸음 앞섰던 남자의 팔을 붙든다. 여자는 깔깔댄다. 깔깔대며 무섭다고 야단이다.
자기 무섭지. 아니. 솔직히 말해 봐 무섭지. 하나도 안 무섭다. 마누라 앞이라고 괜히 큰소리치지만 사실은 무서운 거지. 안 무섭다니까.
일곱의 막내로 자란 여자, 방글방글 잘 웃고 눈빛이 초롱하던 여자는 알고 보니 맹탕이었다. 셈이 흐려 가계부를 못 쓰는 여자였고 서류 앞에서는 고만 까막눈이 되는 여자였다. 명절날 부엌을 팽개치고 대추를 따러 가겠다 장대를 들고 나서는 여자였고, 까만 염소를 안아보려다 손을 물려 시골보건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여자였다. 천렵에 나선 시댁 남정네들 뒤를 숏팬츠 차림으로 따라 나섰다가 개울의 갈대날에 다리를 온통 베이고 쓸려 눈물이 글썽글썽하던 그런 여자였다. 여덟의 맏이로 태어난 남자는 그런 여자를 있는 그대로 보아주었다. 꽃잠을 자고 난 이후 스물 네 해가 흐르도록.
그런데 지금, 삶이 출렁거린다. 여지껏 잘 걸어왔다. 비탈이긴 하지만 단단한 땅을 밟고 왔다. 때로 너설을 지나야 했지만 그래서 풍광은 더 고왔던 길이다. 그런데 이제는 허방을 건너야 한다. 걸음을 옮길 때 마다 다리가 흔들린다.
남편의 간에 불안한 신호가 왔다. 시아버지는 간암으로, 시삼촌은 간경화로 돌아가셨다. 남편도 이미 약물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다. 늘 주위를 맴도는 불안한 초침소리. 그리고 이번 정기검진, 종양성 결절이 보이니 정밀검사를 하라는 소견이 나온다. 어제 CT를 찍었고 내일 오후면 결과가 나온다.
자책한다. 스트레스가 주적인데, 글을 씁네 하고 조와 울을 건너다니던 나를 견뎌내기 힘들었겠구나. 늘 그랬던 것처럼 할 수 있는 한 나를 견뎌주었구나. 뻥뻥 뚫리는 가슴 속의 구멍, 그 구멍들로 거센 비바람이 쏟아져 들어온다.
나는 말한다. 여우는 못되었지만 그래도 토끼 같은 마누라는 아니었더냐고, 그 토끼가 이제 진가를 발휘할 날이 왔다고. 내 간을 떼어 주겠다고, 만약 전체가 필요하면 몽땅 다 주겠다고. 깔깔대며 말하는 나를 남편은 여전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남편의 손을 잡아끈다. 자기야 가을이잖아, 단풍 봐야지. 감포 고개길의 가을, 많이 아름답잖아. 가자, 우리 놀러 가자.
십여 년 전에 들렀던 길을 되돌아본 가을 하루. 돌아오는 길은 이미 깜깜하다. 피곤해 하는 남편을 채근해서 기어이 운전석에서 몰아낸다. 밤길, 더군다나 고속도로를 가야 한다. 두려웠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핸들을 잡는다. 떨린다. 지금껏 고속도로는 남편의 몫이었다. 겁 많은 마누라가 속도에 벌벌 떠는 걸 아니까 아예 맡길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 낮엔 내가 차를 달려서 왔다. 그리고 이제는 밤길을 달려야 한다.
엑셀을 밟는다. 조금씩 속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무섭기는 하지만, 씽씽 달려야 하는 고속도로가 무섭지만, 더욱이 밤길은 처음이지만, 그래도 막상 달리기 시작하니 다른 차들과 엇비슷하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진다. 가만히 숨을 다듬는다. 목젖까지 차올랐던 숨을 뱃속의 가장 낮은 곳으로 천천히 밀어 내린다. 차창 너머로, 까맣게 맑은 하늘이 그득하다. 드문드문 까막별도 보인다.
그래, 이렇게 가면 될 것 같다. 어쩌면 한동안은 밤길을 씽씽 달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2015 에세이문학 봄호
특집 '젊은작가 클릭클릭' 수록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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