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동해의 형제섬

yullee kim 2015. 3. 5. 01:34

 

동해의 형제 섬


전성옥


천길 깊이의 검푸른 바다가 바위섬을 감돌고 있다. 거대한 해자다. 누구도 침범 말라. 아무도 다가오지 말라. 설령 너일지라도 나를 밟지 말라. 시퍼런 서슬과 검은 위엄을 나는 감히 거역하지 못한다.

섬……, 독도는 태고의 외로움을 기품 있게 지니고 있다. 세상을 덮으려는 바다를 뚫고 온 몸을 긴장한 채 육중하게 솟아올라있다. 섬 주변을 오르내리며 빈틈없이 초계를 서고 있는 괭이갈매기와 슴새shearwater들,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매끈한 새의 날개, 쏘아보는 새의 눈, 그들은 말한다. 너는 육지의 속인이 아니더냐. 가까이 오지 말라, 때 묻은 너의 손을 나의 주군에게 닿게 하지 말라.

발 딛음을 허락받지 못한 배는 천천히 섬을 돈다. 뱃전에 선 나는 섬의 이야기를 듣는다. 나를 압도한 섬은 명령한다. 나를 기억하라, 내 장엄을 경배하라.


배를 네 시간 달려 울릉에 닿았고, 한 시간 반을 또 다시 달려 독도에 닿았다. 그러나 접안하지는 못한다. 독도는 일 년에 오십일 정도만 인간의 출입을 허락한다. 날씨 탓이라고 했지만 어디 꼭 날씨 탓만이겠는가. 자신을 배알하러 오는 인간의 속내를 검고 푸른 바다에 미리 비추어 보았을 것이다. 불손한 자는 감히 나에게 닿으려 하지 말라, 준엄한 경계를 둔 것이리라.

속진俗塵에 절은 나는 배의 갑판에 서서라도 동해의 주인을 만나게 됨에 정신이 황황하다. 섬은 가파르다. 가파른 섬을 돌아간다. 태양을 마주하자 빛이 가린 섬의 뒤편은 어둡고 검다. 어둡고 검은 절벽을 따라 해식아치와 해식동들이 나타난다. 군데군데 솟아 오른 외돌개, 그 높고 날카로운 실루엣, 신령스러움이 더해진다. 바닷물도 어둡고 검다. 어둡고 검은 바닷물은 흑요석처럼 빛난다. 흑요석 같은 바닷물은 삼엄하게 섬을 호위하고 있다. 다가오지 말라.

크고 우람해야만 장엄하고 신령스러운 것이 아니다. 독도는 충분히 장엄하고 충분히 신령스럽다. 이 깊고 사나운 바다 한 가운데, 이웃 섬 하나 보이지 않는 이 막막한 곳에서 홀로 사백오십만 년을 살아왔다. 울릉도보다 이백만 살이 많고 제주도보다는 삼백만 살이나 많다. 더욱이 암초섬인 독도가 실은 울릉도 두 배쯤의 면적을 가지고 있다. 솟아나온 봉우리 주변으로 넓은 해저섬이 펼쳐져 있고 그 깊숙한 곳에 검은 보물, 지구 최후의 에너지인 ‘메탄 하이드레이트’를 품고 있다. 그래서 섬은 이토록 검고 이토록 신령스러운 것이리라. 섬을 수호하고 있는 바닷물도 검게 빛나고 초계를 서는 새의 눈빛도 이토록 번득이는 것이리라.

섬의 수호를 바다와 새의 수고에만 기대고 있는 것은 불경이며 태만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빛나는 젊음을 가진 우리의 아들들이 섬을 섬기고 있다. 배가 다가가자 선착장에 나란히 선 푸르른 아들들, 거수경례로 긴 인사를 한다. 상륙할 수 있었다면 품에 담쑥 안아주고픈 그 아들들을 갑판 위에서 바라본다. 섬을 감도는 바닷물의 엄호는 속진 묻은 인간의 말 한마디 까지도 철저하게 차단한다. 몸짓으로 말을 전한다. 머리 위로 커다란 하트를 그려 사랑을 전한다. 잠시 뒤 아들 하나가 경례를 풀고 같은 하트로 답을 보내온다. 누가 낳고 누가 길렀건 오늘은 모두 내 아들이다. 아들아…… 국토를, 국가를 부탁한다.


독도의 동생인 우산국은 푸르게 빛나는 보석의 나라이다. 섬 가장자리를 따라 아쿠아마린빛의 바다가 감겨 있고, 쨍한 햇살이 그 물에 스며든다. 푸른 유리바다 속으로 스며든 빛살은 잔잔히 갈라지고 천천히 부서지며 말랑말랑 반짝인다. 챙그랑 쨍그랑 자르르르…… 부숴져 내린다. 액체 보석이다. 물은 빛살에 의해 액체 결정이 되어 그 면마다 빛을 반사하고 있다. 손을 넣어 건지면 푸른 보석이 자그르르 창창 건져질 것 같다. 두 손 가득 푸른 알갱이가 담겨질 것 같다.

우산국은 깊은 산의 나라이다. 깎아지른 산들이 서로의 그늘에 덮여 어둡고 신비롭다. 깊은 산의 뿌리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해안길. 그 길 위 비탈언덕의 아찔한 모퉁이, 뼈가 하얗게 드러난 나무들, 섬백리향이다. 나무들은 깎아지른 벼랑 끝에서 갖은 풍상을 겪어내느라 한 뼘도 곧게 자라지 못하고 마디마디 꺾이고 줄기줄기 엉겨 있다. 그러나 그 위태한 곳에서도 제 본분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향기로 세상과 바다를 덮는다. 오래 전 먼 바다에서 길을 잃은 어부가 별도, 나침반도, 등대불도 아닌 이 나무의 향기를 따라 집을 찾아왔다. 울릉은 파리, 모기가 드물고 뱀은 아예 살지를 못한다. 육지에서 일부러 들여온 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린다. 인간에게는 삶의 향기로 다가가는 섬백리향이 다른 무엇들에게는 죽음의 향기로 덮쳐가는 까닭이다. 그러나 아직은 다 알 수 없다. 저 깊은 산에 무엇이 더 잠겨 있는지는…….


섬은 사람이다. 올망졸망 점점이 떠 있는 서해의 섬들은 순하고 어진 백성들이다. 그들은 평화롭고 여유롭다. 바다를 느긋이 맞아들이고 느긋이 보내준다. 바람도 느긋이 불고 개흙도 느긋이 무르다. 제주는 향낭을 차고 장옷을 기품 있게 쓴 정경부인이다. 경사가 연한 해안길과 얇고 넓게 펼쳐진 바다를 대란치마처럼 둘러 감고 있다. 그에 반해 울릉은 태양에 그을리고 바람에 거칠어진 중년의 장수다. 도성에서 먼 외지, 칼바람이 부는 변방에서 뭇 적들을 막아내던 눈빛 형형한 야전장수이다. 울릉은 그 장수의 힘줄처럼 강하고 그 장수의 눈빛처럼 깊고 맑다. 울릉은 아름답게 긴장하고 있다. 온 몸의 힘줄을 세우고 근육을 긴장시키며 피부까지 소름을 돋쳐 놓고 섬모 한 터럭까지도 빳빳이 긴장하고 있다. 굳은살 박힌 손에 병장기를 움켜쥐고 주문처럼 최면처럼 쉬지 않고 중얼거린다. 나는 국토의 최종지이다. 적이 오면 가장 먼저 맞설 것이다. 지그시 다문 이빨 사이로 낮게 으르렁 댄다. 나는 긴장해야 하고 강해야 한다.


늦은 오후, 도동에서 저동을 잇는 긴 해안길을 걷는다. 높고 낮은 길 아래 바다가 가득하다. 고동색 감태들이 나긋나긋 몸을 흔드는 청록색바다, 파도를 따라 흔들리는 바다숲…… 후르르 긴 바람이 불고 가뭇이 어둠이 내린다. 가파른 길을 따라 노란 전등들이 하나 둘 켜진다. 뭍에서 잃어버렸던 길이 여기에서 보인다.

바다에 별이 맺힌다. 검은밤이 오기 전의 푸른밤, 푸른 수평선을 따라 별이 맺힌다. 인간이 켜는 별빛, 바다생물을 부르는 별빛배들이 하늘과 바다의 경계에 서 있다. 어디 하늘의 별만 빛나고 아름다우랴. 밤을 밝히는 인간의 눈빛 그 인간이 켜 놓은 마알간 유리등, 모두 빛나는 별이다. 아름다운 별이다.

수평선의 별을 보며 걷는 울릉의 여름밤, 너는 누구냐…… 기슭에서 철썩이는 바닷물이 밤새 묻는다. 몸을 옭아매던 뭍의 긴장이 한 겹 한 겹 풀어져 내린다. 긴 별이 밤새 내려앉는다.

 

2015 동서문학회 동인지 수록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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