木鬼에 홀리다
섬뜩해라. 저 기괴한 모양, 엄청난 몸집. 길고 긴 저 팔들은 도대체 몇 개인 거야. 숱 많은 머리칼 좀 보아. 밤하늘을 다 가리고 있어. 번들대는 윤기에 사포처럼 거친 몸통 어쩌면 좋아, 더운 섬나라의 도마뱀, 그 커다란 도마뱀의 잔등 같아.
제발, 소리 내지 마. “촤르르르 찰찰…… 우웅 웅” 어둠을 울리는 이 소리, 무당의 요령처럼 찰찰거리며 무슨 의식들을 하는 게야.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 주문을 외는 게야. 다가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 어떡하지, 나는 알아버렸어. 찬양만 받아온 너희들이 사실은 이렇게 징그럽고 음울한 존재인 것을, 그 풋내 나는 실핏줄 속에 세상을 움켜쥔 힘을 숨기고 있는 것을 나는 알아 버렸어. 그렇지만 진정해, 네 비밀을 알았다고 내가 너의 적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 나는 그저 무서울 뿐이야.
개울을 따라 긴 산책로가 이어져 있다. 천변 둑 위로 내 허리 보다 굵은 목귀(木鬼)들이 파충류의 가죽 같은 표피를 두르고서 줄줄이 도열해 있다. 둑길을 걷는 나는 머리를 싸쥔다. 메두사처럼 잘라도 잘라도 끝없이 돋아나오는 검고 긴 팔들, 뻗어 나와 늘어진 그 팔들이 머리칼을 잡아당길 것 같다. 우우웅~, 깊은 산의 무서운 짐승처럼 이빨을 지그시 물고 으르릉 댄다. 내 가슴은 한 치씩 오그라든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모자라는 모양이다. 여자의 공포만으로는 아직 양이 차지 않는 모양이다. 이파리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수많은 얇은 것들이 얇다란 바람조각을 수천수만 배로 증폭시고, 수천수만 개로 갈라서는 제 겨드랑이 아래로 지나가는 여자에게 위협을 가한다. 수천수만의 목소리로 윤창을 한다. ‘찰찰찰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찰찰찰찰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머리뿌리가 송글송글 뭉친다. 피부에 오돌토돌 요철이 돋는다.
무언가 투둑투둑 떨어진다. 아, 어떡해. 저 끈질긴 것들이 결국, 결국 피를 뿌리고 있다. 온 바닥이 핏자국이다. 불긋불긋 검자주빛 얼룩이 길바닥에 가득하다. 불끈, 발에도 밟힌다. 위잉, 바람이 분다. 내 머리 위에도 떨어진다. 얼른 손으로 떼어낸다. 손바닥에 닿는 끈끈하고 축축한 피의 촉감. 손에 피를 묻히고 밤길을 걷는 여자, 누가 보면 뭐라 할까.
초여름 밤, 온천천 천변을 걷는 나는 벚나무에 시달리고 있다. 듬성듬성 서 있는 가로등, 그 희뿌연 빛살 아래 보이는 크고 음산한 것들. 얼마 전, 이들이 보여주던 분가루 같은 하얀 웃음. 그것은 전주곡이었다. 하얀 소복을 입은 목귀의 웃음이었다. 웃음기가 싹 가신 지금, 누구의 영혼을 베어 먹었는지 뚝뚝 핏방울을 흘리고 있다. 검붉은 버찌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목귀에 홀린 나는 아득히 전율한다.
현대문명의 종말을 시뮬레이션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다큐 속에서는 인류가 사라진 도심이 파괴되고 있었다. 비와 바람이 몰아치고 건물이 낡아 갔다. 숨어살던 쥐가 길 위로 등장하는 것을 시작으로 각종 동물들이 도시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잔재들을 파괴하지 않았다. 오히려 건물 귀퉁이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 파괴의 주범, 그들은 생각지 않은 곳에 상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도심의 보도블록 틈새로 씨앗들이 날아와 자리를 잡고 연둣빛 순을 틔웠다. 파란 넝쿨풀이 건물을 타고 오를 즈음 풋풋한 어린나무들이 등장했다. 여리고 보드랍던 그들은 점차 강해져 갔다. 드디어 나무의 힘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어떤 큰 망치로 두들겨도 실금 하나 못 낼 듯 견고해 보이던 거대한 마천루들이 그들에 의해 균열을 일으키고 마침내는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부서진 건물더미를 뚫고 또 다시 나무가 자라 올랐다. 공포스러웠다. 끝없이 자라는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 하나를 온전히 제 발 아래 집어넣었다. 사자를 비롯하여 강력한 턱 힘을 가진 맹수들도 사람의 오막살이 하나 물어뜯어 허물 수 없다. 그러나 풀과 나무는 어떠한 건물, 어떠한 바위라도 마음만 먹으면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분명 그들에게는 마법의 액체가 있음이 분명하다. 더하여 영원에 가까운 시간도 가지고 있다. 급할 것도 서둘 것도 없다. 그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천천히 차곡차곡 움켜 쥘 뿐이다.
어쩌면 이 지구도 나무가 움켜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땅 아래로 뻗은 그들의 손이 지구를 놓아 버리면 지구는 사방으로 흩어져 나갈 것이다. 중력 따위, 물리학자들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무는 공기도 움켜쥐고 있다. 동물이 숨 쉬어 온 수십억 년, 인간이 숨 쉬어 온 삼백만 년. 그 공기의 주인도 나무다. 땅과 산소를 쥔 그들은 세상의 실제적인 지배자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여린 척, 선한 척, 군자인 척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며칠 전, 통영에 있는 박경리의 묘를 찾았다. 묘는 석축도 없고 비석도 없다. 이름과 생몰연대도 새겨 넣지 않은 회청색의 상석 하나만 달랑 놓여 있다. 겸허한 대작가의 모습에 숙연해진 나는 그저 조용히 서 있다. 눈빛 하나가 등에 닿는다. 뒤를 돌아본다. 나무다. 두어 자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커다란 소나무다. 용의 몸체를 한 그는 비늘 가득한 허리를 느릿하게 휘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할 말이 있어 보인다. 나도 물어볼 것이 있다. 다가가서 그의 몸체에 귀를 대고 묻는다.
‘땅 속으로 손을 뻗는 너는, 혹시 여기 잠든 박경리의 손을 잡아 보았나.’
나무는 대답 대신 내게 되묻는다.
‘너는, 바위를 녹여 발을 뻗는 내 힘을 털끝만큼이라도 따라 올 수 있느냐. 내 나이 반만큼이라도 숨붙이 노릇을 할 수 있느냐.’
내게 대답이 있을 리 없다. 그저 그의 몸에 등을 붙이고 서 있다.
‘그러면 그냥 두라. 뭇 숨탄것들, 그 목숨붙이들이 편안하게 숨 쉴 수 있게 그냥 두라.’
언제 무엇을 압살한 기억들을 찾아본다. 나무는 내 속을 말갛게 들여다보며 다시 묻는다.
‘네가 박경리의 절반만큼은 쓸 수 있느냐.’
열심히 하면 삼분의 일 정도는 쓸 수 있겠다 대답한다. 나무는 말한다.
‘그러면 그냥 두라. 공연히 내 벗들의 목숨을 앗고 그 몸체를 녹여, 어쭙잖은 너의 글쪽 따위를 담아 낼 생각, 그런 무례함 애초에 갖지 말아라. 너의 지적허영을 위해 세상의 주인인 우리가 몸을 내어주어야겠느냐. 뭇 숨탄것들이 숨이라도 편히 쉬게 우리를 그냥 두라.’
등에 닿는 용의 비늘이 눅진히 눌려든다.
지난 초여름밤 나를 홀리던 벚나무. 내 머리에 뚝뚝 핏방울을 떨어뜨리며 까지 하려던 말, 그 말을 그때 알아들었어야 했다. 계절 하나가 온전히 바뀌고 낮선 곳의 靑牛에게 와서야 귀가 뚫린 나는 홀림 받아 마땅한 자이다. 짙어가는 밤, 천변으로 나가보아야겠다. 마른 비늘을 털고 있을 벚나무에게 말을 걸어 보아야겠다.
‘목귀 그대여, 평안하라. 당부하노니 부디 평안하라.’
靑牛 - 강희안의 양화소록 “천 년이 지난 소나무는 그 정기가 靑牛가 되고 伏龜가 된다”
2015 에세이문학 봄호
특집 '젊은작가 클릭 클릭' 수록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