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령(占領)
‘품위 없고 교양 없는 것들…….’ 샤워용 헤어밴드 아래로 땀이 미끄러져 내린다. 온 몸의 찌꺼기들이 바늘 끝 같은 땀구멍으로 천천히 녹아 나간다. 느긋하고 편안하다. 저 여자들만 아니라면 정신까지 맑아질 것인데.
진순이 잠겨 있는 탕 가장자리에 두 여자가 웃고 떠들고 있다. 긴장을 놓아버린 물렁한 몸들이 겹겹이 쌓여있다. 굵은 허벅지 위로 크고 작은 타이어 같은 배가 몇 줄씩 쌓이고 그 배 위로 두 개의 산이 늘어져 내렸다. 백제릉(百濟陵)같이 둥그마하게 살찐 어깨, 저 속에 든 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볼이 축 쳐진 얼굴들이 짧은 목 위에 올려 져 있다. 눈썹 문신만 새까맣게 선명한 것이 흡사 관촉사 미륵불 같다. 붉게 달궈진 그녀들의 얼굴 위에서 한층 도드라져 보이는 문신, 그 푸르딩딩한 문신 가장자리는 여자들의 얼굴을 더 값싸 보이게 한다. 마치 정육점의 돼지엉덩이에 찍힌 푸른 등급표식 같다.
‘하긴 저것들이 돼지와 뭐 별반 다를 게 있을라고…….’ 진순은 여자들의 수다에 진저리를 친다. 그녀들은 중간 중간 백제릉 같은 어깨를 낮추며 얼굴을 가까이 모아 소곤소곤 말을 하고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여진을 정리하듯 서로 눈을 마주치며 키득거린다. 무슨 종류의 대화인지 듣지 않아도 알 만하다. 이제 여자들의 주제는 다이어트로 넘어간다.
‘백날을 해 보아라, 너희들 허리에서 자전거 타이어 하나 없어지지 않을 테니.’ 진순의 이런 생각이 터무니없지도 않다. 욕탕 가장자리에는 삶은 달걀들이 놓여 있다. 볼을 부풀려 계란을 우물거리는 여자, 음료를 빨아들이느라 볼을 쪼그려뜨리는 여자…… 먹고 노는 것에 인생의 목표를 걸어버린 여자. 나가서 십 원 한 장 벌어오지 않으면서 전장을 치르고 돌아오는 제 남편에게 집안 일이 힘들다 투정하는 여자, 어쩌다 시집 식구와 통화라도 한 날이면 전쟁터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제 남정네를 사정없이 상이군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여자,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려 밤잠을 설치고, 다음날 저와 같은 무리들을 모아 백화점으로 내달리는 여자들. 진순은 혀를 찬다. ‘쯔쯔…… 상종 못 할 것들이 타고 난 팔자는 좋아서…… 하긴 팔자가 좋은 건지, 능력이 없는 건지.’
사우나에서 나온 진순은 은색 대형차를 끌고 느긋이 달린다. 마천루, 도시가 환하게 내려다보이는 마천루의 창가 침대. 진순은 가슴에 타월을 두르고 어깨를 드러낸 상태로 잠을 청한다. 샵 안은 엷은 레몬그라스 향이 해금소리와 묘하게 섞여 흐르고 있다. 조금 전 엘리베이터 앞에서 90도로 진순은 맞았던 여자는 각종 피부 관련 제품이 담긴 키트를 밀고 와서 진순의 얼굴에 바르고 문지르느라 손이 바쁘다. ‘레몬그라스에 해금이라…… 뭐 어찌 되었든…….’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진순의 차를 보고 경비원이 거수경례를 붙이며 차단기를 올려준다. 집은 말끔히 정리되어 있다. 부엌은 물방울 자국 하나 없이 정갈하다. 나오면서 살펴보라 말해 놓았던 베란다 유리창도 얼음처럼 말갛게 닦여 있다. 서너 번 사람을 갈아치운 후 결정한 삼십 대 후반의 이 도우미는 일을 마음에 들게 한다. 아이의 학원비를 보충하기 위해 남편 몰래 살짝살짝 남의 집 일을 한다고 했다. ‘일도 배운 여자들이 잘 하는 법이야, 사는 격이 다르면 일의 격도 다르지…… 쯔쯔, 여름 커튼이라고 세탁기로 마구 돌려버리던 그 나이 든 여자는 정말…….’
진순은 새파란 해초 죽 한 공기를 데워 식탁에 올린다. 붉은 토마토 두 조각과 간장소스를 살짝 얹은 연두부를 옆에 놓는다. 오독오독 톳이 씹히는 식감이 좋다. 얇은 은수저로 연두부를 천천히 떠서 입에 넣는다. 소리 없이 삼킨다. 두어 시간 전 목욕탕에서 보았던 여자들, 비계 덩어리 같은 여자들이 우걱우걱 삶은 계란을 삼키던 모습이 떠오른다. 갑자기 목이 막힌다. 기침, 기침을 한다. 기침 때문에 목이 막힌다. 죽을 듯이 기침을 하던 얼굴, 얼굴들. 그 얼굴들 때문에 기침이 난다. 기침이 가라앉지 않는다. 숟가락을 놓고 일어서며 심호흡을 한다. 미지근한 물을 삼킨다. 겨우 진정이 된다. 서둘러야겠다. 유경이 학교가 파할 시간이 다 되어 간다.
유경엄마는 신신당부를 했다. 유경이 학교에 갈 때는 품위 있고 고급스럽게 차리고 가시라고, 그 말이 아니더라도 그냥 갈 진순은 아니다. 하지만 아침에 앓는 소리를 해 놨다. 요즘 날씨가 좀 변덕이 심해야지, 이런 간절기에는 대체 어떻게 입어야 할까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려 놓았다. 금요일인 오늘 저녁 유경이 부모는 마카오로 날아갈 것이다. 그곳에서 골프와 쇼핑으로 이틀을 보내고 일요일 늦은 밤 돌아올 것이다. 괜찮은 여름 재킷 하나 정도는 사 오리라.
유경의 학교는 진순이 사는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시 외곽에 있다. 진순은 한 시간 남짓 달려 수목원 같은 학교 운동장에 도착한다. 붉은 넝쿨 장미가 담장 가득 엉겨있다. 제 한철을 있는 힘대로 살고 있다. 더 뻗어나갈 곳이 없는 점이 한이다. 처음에는 울타리 바닥에서 살금살금 기어올랐을 것이고, 담장 철망을 손에 쥐고부터는 점차 영역을 넓히며 담장을 점령해 나갔을 것이다. 지금은 담장 꼭대기에서 한 발이나 자라 올라 그 끄트머리까지 꽃을 달고 있다. 붉은 꽃이 가득 달린 가지가 바람에 휘청휘청 몸을 날리고 있다. ‘암…… 제 한 철을 악착같이 살아야지 그래야 하고 말고, 그런데 저 장미는 욕심이 과하군. 담장 위로 무작정 뻗으면 어쩌자는 거야.’
규모가 크지 않은 이 학교는 조경이 잘 되어 있고 건물의 설계도 일반 학교들과는 많이 다르다. 게양대에 태극기와 오성홍기가 같이 날리고 있고, 학생들도 국내에 체류하는 고위급 중국인 자녀들과 상류층 한국 아이들이 반반 정도로 섞여 있다. 수업은 영어와 중국어로 진행된다. 졸업할 무렵이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영어와 중국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 있다. 그리고 연계되어 있는 중국계학교나 또 다른 외국계 중고등학교로의 진학이 유리하다. 그리고 대학까지. 즉, 지옥 같은 한국의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미국이나 중국의 명문대학교로 유유히 진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만큼 얼마 안 되는 이 학교의 정원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치열한 경쟁을 한다.
학교는 아이들의 정서와 부모들의 편리를 세심하게 고려했다. 통나무를 많이 사용하여 건물을 지었고, 위치도 자연 속에 있으나 도시와의 도로망이 잘 연결되어 있으며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기반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곳을 선택했다. 귀족학교가 들어서자 그에 걸맞은 카페며 식당들이 고급스런 외장을 하고 뒤이어 등장한 것도 물론이다. 거기다 학교와 이웃한 소류지는 연꽃으로 가득 차 있다. 학교 담장에 감긴 붉은 장미가 꽃 피우기에 지쳐갈 무렵이면 소류지에 연꽃이 뜬다. 발그레하고 하얀 연꽃이 푸른 잎들 사이로 환하게 떠오른다. 두터운 연꽃잎 위에 개구리가 앉아 놀기도 하고 개구리를 노리는 물뱀이 연꽃 뿌리가 잠긴 어두운 물속으로 소리 없이 미끄러지기도 한다. 자유활동 시간이면 소류지 둔덕길 위에서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키기도 하고 환호성을 쏟아내며 흩어지기도 했다. 햇볕이 따가운 날에는 발갛게 단 얼굴 위에 푸른 연잎모자를 쓴 아이들이 종다리처럼 조잘대며 학교로 돌아오곤 했다.
유경이 이 학교에 입학이 확정된 날 유경 엄마 윤미는 자신이 타던 차를 진순에게 내어주었다. 월요일 아침 학교에 보내고 금요일 오후면 다시 집으로 데려와야 하는 반 기숙학교라 아이를 챙기기 힘든 윤미 부부는 차와 함께 아이를 맡긴 것이다. 윤미의 친정엄마는 말했다. 젊고 좋았던 시절은 네 아버지 뒷바라지와 공부하는 너희들 키워내는 것에 다 소비해버렸고, 네가 전문의 딸 때까지 유경이 키워준 것만으로도 나는 어미 노릇을 충분하게 하였으니 이제 더이상 아이 맡길 생각은 말라고. 그리고는 바람처럼 세상을 돌고 있었다. 이구아수 폭포 앞에서, 터키의 파묵칼레에서 그리고 케냐까지 달려가서 사자와 사진을 찍고 왔다. 돌아와서는 그 사진들에 인생을 담은 듯이 다시 보고, 다시 보고 또다시 꺼내어보곤 했다. 그렇다고 봉화에서도 한참 더 들어가는 깡촌에 사는 시어머니께 아이를 보낼 수도 없었고, 아이를 맡기기 위해 시어머니와 한집에 사는 것은 더더욱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럴 즈음 월궁의 제조상궁 같은 진순이 나타났다. 기품 있는 음식을 만들어내고 행동까지 우아한.
그러나 진순의 더 큰 가치는 딴 곳에 있었다. 서울대학교 보다 들어가기 어렵다는 이 귀족학교에 아이가 입학하게 된 계기와 조건을 제공한 것이다. 유경의 부모는 아이의 영어 습득을 위해 집에서는 될 수 있으면 영어로 말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경도 간단한 일상대화 정도는 자연스레 영어로 말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유경의 입에서 중국어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진순과 소곤소곤 말을 하더니 둘이서 손뼉을 딱딱 치면서 중국어로 소리를 지르곤 했다. 윤미는 눈이 번쩍 뜨였다. 중국어…… 중국어라니, 세상에 중국어라니! 어쩌면 앞으로는 대부분이 구사하는 영어보다 중국어가 더 절실할지도 모르는데 여섯 살 유경이가 그 중국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진순의 입에서 중국어가 나오고 그 말을 아이가 따라 하는 것이다.
얼마 뒤, 윤미는 유경을 데리고 중국어 학원을 찾았고 상담실장은 놀란 눈으로 말했다. 아이가 표준 중국어를 구사하네요. 어디 누구에게 배웠나요. 그저 주변의 아는 이에게 잠깐 배웠다는 윤미의 말에 상담실장은 말을 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지방에서 온 중국인, 특히 연변인들이 많은데 그들이 말하는 중국어는 같은 중국인들도 알아듣기 힘들어하지요. 그런데 유경이는 아주 정확한 북경어를 구사하네요. 중국어를 조금 더 잘 하게 되면 명문중국인학교 입학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복잡한 서류와 돈이 좀 들긴 하겠지만요.
여러 개의 모니터에 지진계처럼 나타나는 선과 숫자를 통해 환자의 바이털을 체크하면서도 윤미의 시선은 자꾸만 텐딩을 넘어간다. 환자의 가슴께에 쳐진 텐딩 너머로 초록색 수술복과 마스크를 낀 기호의 얼굴이 보인다. 초록색 마스크에 덮였어도 기호의 얼굴윤곽은 뚜렷하다. 안경알을 넘어온 눈빛은 긴장으로 빛나고 있다. 필요한 의료기구를 건네받기 위해 피 묻은 장갑 낀 손을 절도 있게 펴곤 한다. 이 공간에서 기호는 신이다. 둘러선 스탭들은 그의 손짓, 눈빛 하나에 빈틈없이 움직인다. 수술실 안에서 그는 모든 것의 주인이다. 환자의 생명까지 그의 손에 쥐어져 있다.
인턴 시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뒤통수에 질끈 묶은 머리로 운동화를 질질 끌며 병원을 뛰어다니던 윤미에게 큰 키를 휘청이며 역시 복도를 바쁘게 걸어 다니던 기호의 모습은 신선했다. 좌우보다 앞뒤가 확연히 긴 두상, 좁은 얼굴 가운데 죽 내려앉은 높은 콧대와 그 코허리에 두꺼운 안경이 올라앉아 있는 기호의 얼굴은 마치 양자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의 젊은 얼굴 같았다. 동양인보다 서양인에 가까운 얼굴 골격과 큰 키, 그리고 탁월한 영민함. 그런 기호가 경북 깊숙이 자리한 봉화, 그 봉화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하는 이름도 생소한 산골 마을 출신인 것이 윤미는 믿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기호는 오히려 이를 자랑스러워했다. 자신은 깊은 산의 맑은 정기를 타고났기에 세상이 무섭지 않다했다. 윤미는 그런 기호가 좋았고 딸의 선택에 그녀의 부모들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병원 가까운 곳에 기호의 아파트를 마련해 주었고 넉넉지 않은 기호의 부모를 대신하여 의대 졸업까지의 학자금을 해결해 주었다. 딸만 둘인 윤미의 부모로서는 잘 자란 아들을 데려오는 것이니 투자가치는 충분했다. 무엇보다 딸이 기호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윤미는 의사라는 직업은 좋았지만 아픈 환자의 찌푸린 얼굴을 상대하거나 피가 넘쳐나는 수술실에서 손끝 하나까지 긴장하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윤미는 마취과를 선택했다. 깨어있는 환자를 상대하지 않아도 되는 의사, 윤미의 목적에 딱 적합한 그런 의사였다. 거기다 요즘 들어서 자신의 선택이 탁월했음을 새삼 확인하고 있다. 아이의 취학과 함께 생활에 드는 돈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증가되었다. 이러한 때에 아르바이트로 하는 성형외과 출장 마취 일은 요긴한 금전수입원이 되어주고 있다. 성형수술의 스케일이 커지며 전신마취하에 이뤄지는 수술이 많아졌지만 대부분의 성형외과는 마취과 의사를 따로 두지 않는다. 마취과의사의 전성시대가 온 것이다. 윤미는 오늘도 진료가방을 챙겨들고 성형외과가 몰려있는 지역으로 달린다. 집으로 전화는 이미 해 놓았다.
“이모님, 저 오늘 외부 일 한 건 처리하고 가야 됩니다. 유경 아빠도 응급수술 잡혀서 늦을지도 몰라요.”
‘아무렴…… 열심히들 하려무나, 구십 두 평짜리 이 집은 내가 잘 간수하고 있을 터이니. 그런데 오늘은 도무지 입맛이 없군, 새콤한 비빔국수나 만들어 볼까.’ 전화기를 놓은 진순은 부엌으로 발을 옮긴다.
애초에 진순이 이 집으로 온 것은 음식 때문이었다. 부부는 바깥에서 먹는 식당 밥에 진저리를 쳤다. 값싼 재료와 불결한 위생을 조미료라는 만능키로 덮어버리는 식당 음식. 언젠가 윤미는 유명하다는 막국수 집에서 기겁할 장면을 목격했다. 동료들과 함께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다 잠시 바람을 쐬려 식당 뒤편으로 난 문을 열었을 때였다. 닭발들이 가득가득 담긴 여러 개의 빨간색 대형 소쿠리가 보였다. 소쿠리들은 기름때에 절어 있었고. 담겨있는 닭발들에는 미처 떼지 못한 닭똥과 뱀 허물 같은 노란 껍질들이 징그럽게 붙어있었다. 붙어있는 것은 닭똥과 허물뿐만이 아니었다. 콩알만 한 시커먼 파리들이 떼로 몰려와 닭발 위를 자박대며 빨아먹고 있는 데다, 또 그 위를 식당 종업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타 넘어간다. 발에 밟혀 너덜너덜해진 바짓가랑이가 닭발들을 쓸었고 몇 개는 소쿠리 바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식당은 닭고기 육수로 맛을 낸다며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탄 집이었건만 그날 윤미는 한 젓가락도 삼킬 수가 없었다.
며칠 뒤 윤미는 음식 잘하는 가사도우미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기가 보지 않는 사이에 해 놓고 가는 음식의 위생을 믿을 수가 없었고, 입에 맞는 음식을 조미료 없이 요리 할 수 있는 이도 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진순과 연결이 되었다. 그때 진순은 말했다. 관료들이 몰래 드나드는 유명음식점의 주방에서 십년 이상 일을 했으니 다른 이들보다는 훨씬 나은 대우를 원합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두세 번 방문을 해서 집안일과 요리를 해 놓고 가는 정도였다. 그녀의 장담대로 진순의 요리는 정갈했고 담백했다. 윤미 부부는 만족했다. 특히 산골에서 자라 토속적인 입맛을 가진 기호에게 진순의 요리는 고향을 옮겨다 준 것 같았다. 진순은 특히 산채 요리를 잘했다. 각종 산나물을 때에 맞춰 준비하고 요리했다. 봄이면 새파랗게 데친 원추리 순에 된장을 살짝 넣고 무쳐 통깨를 솔솔 뿌려 내었고, 여름에는 취나물을 쌉쓰름하게 삶아 간장과 참기름으로 맛을 내었다. 겨울이 오면 말린 나물들로 갖가지 반찬을 만들었다. 고사리에 조갯살과 들깨 가루를 넣은 찜을 만들어 주기도 했고, 쌀과 나물을 함께 넣은 나물밥을 지어서 파와 마늘을 총총 다져 넣은 양념장을 곁들여 내기도 했다. 다시마 우린 물에 두부를 넣어 맑은 장국을 끓여주었고, 부부가 입맛 없어 할 때는 뽀얀 전복죽을 하얀 대접에 담아 포슬한 김 부각과 함께 내어 왔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윤미는 진순에게 입주를 제안했다. 부엌에 달린 작은 방을 내어주겠다고 했다. 원하는 만큼의 보수가 결정되자 진순은 트렁크 두 개를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반년 정도가 지나자 윤미는 곤란한 얼굴로 진순에게 상의해 왔다. 아니 사정을 해 왔다. 여사님 혹시 딸아이를 봐 주실 수 있나요. 하고. 친정에서 맡아 키워주던 딸이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었고 이를 빌미로 친정엄마도 이제는 인생을 즐기고 싶다며 손녀의 육아를 포기했다고 한다. 물론 진순은 육아에 따른 추가보수를 제시했고 윤미는 고맙다며 진순의 손을 꼭 잡았다. 진순은 한 가지를 더 요구했다. 자신의 방을 아이 방 옆으로 옮겨주고 베란다에 붙박이를 설치해서 개인 소지품을 간수 할 공간을 만들어 달라고. 공사는 당장 시작되었고 진순은 원하는 자재, 원하는 디자인으로 인테리어를 했다. 그리고 연두색 벽지로 유경의 방을 도배할 때 자신의 새로운 방도 엷은 그레이 빛 벽지로 도배를 했다. 윤미는 두말없이 비용을 지출했다.
진순으로서는 어려울 것 없는 생활이었다. 음식의 질은 식비를 넉넉히 받아 좋은 재료를 사면 그만이었다. 조금 돈을 더 주더라도 정갈하고 안전한 식재료를 구입해야 한다는 진순의 말은 당연했고 좋은 재료로 만들어내는 음식이 정갈하고 맛있는 것 또한 당연했다. 여섯 살 유경이는 아홉 시 반이면 유치원에 갔고 점심을 먹은 오후 세 시 반에 돌아왔다. 넓은 집에 아이의 장난감과 책은 충분했다. 게다가 아이는 혼자 두어도 잘 놀았다. 간식으로 신선한 과일을 깎아주거나 유기농 밀가루로 비스킷을 만들어 주고 아이가 잘 때 옆에서 책을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육아 자로 대접을 받았다. 뿐만아니라 오랫동안 간병 일을 했었던지라 의사들의 환경과 생리를 꿰뚫었고 자주 사용하는 의학용어도 어렵지 않게 이해하는 진순이다 보니 이런 진순에게 보내는 윤미 부부의 절대적인 신뢰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때 진순은 열여덟 살이었다. 엄마는 동네 부끄럽다며 표나기 전에 떠나라고 했다. 강원도 정선, 탄광촌의 새카만 집 중의 하나에 진순의 다섯 식구가 살았다. 두어 해 전부터 아버지는 일을 할 수 없었다. 일은커녕 진폐증으로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진순은 지난해 고등학교에 진학을 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엄마는 광부들의 아내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탄광 어귀에서 탄을 고르는 채탄 일을 했다. 탄가루를 묻히고 돌아온 엄마는 방구석에서 쪼그려 우는 진순에게 한 해를 쉬면 학교에 보내주겠다고 했다. 얼마 뒤, 새카만 시냇물이 흐르는 방천 둑에 노란 민들레가 박히고 탄가루 묻은 버들강아지가 하늘거릴 때 엄마는 말했다. 네 학교는 네가 벌어서 가야 하지 않겠냐고. 얼마 뒤 진순은 엄마와 함께 채탄장에 있었다. 보이는 모든 것은 까맸다.
생활이 어려운 것은 여전했다. 거기다 아버지는 흔하게 발생하는 진폐합병증인 폐결핵까지 겹쳤다. 멀리 떨어진 결핵 전문병원에 아버지를 보내야 했다. 식구 모두가 한 방으로 옮겨오고 나머지 방 하나에는 하숙을 들였다. 광부 일을 하러 외지에서 온 젊은이였다. 스물여섯이라고 하는 그는 둥글넓적한 얼굴에 늘 싱글거리는 웃음을 웃고 있었다. 탄가루 날리지 않는 맑은 세상에서 이 검은 산골까지 흘러들어온 것을 보면 그 남자의 삶도 피폐하기는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래도 그는 젊었고 무엇보다 외지에서, 탄가루 날리지 않는 곳에서 온 남자였다. 그리고 남자가 항상 하는 말처럼 돈을 조금만 손에 쥐면 다시 외지로 나갈 사람이었다.
싱글거리는 남자는 밥상을 들고 오는 진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진순은 까만 세상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영악한 아이였고, 이 새까만 땅을 벗어날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었다. 뱃속에 든 아이가 여섯 달째로 접어들 때에야 비로소 딸의 상황을 눈치챈 엄마는 두말없이 떠나라고 했다. 남자도 도시에서 방 한 칸 얻을 돈은 마련되었다고 했다. 며칠 뒤 느리게 가는 기차를 하루 종일 타고 최남단 도시의 산동네 마을 방 한 칸에 도착했다. 늦게까지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그 여름, 슬레이트 지붕이 쩔쩔 끓는 방에서 진순은 아이를 낳았다. 단칸방이지만 아들네 집이라고 기어이 함께 있겠다는 늙은 시어머니가 아이를 받았다. 열여덟의 늦여름, 진순은 아들을 낳았다. 아직 성장판이 닫히지도 않은 나이에 아이를 낳았다.
아이 아버지는 맑은 세상에서 살기 힘들어 까만 탄광으로 들어왔던 남자의 본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늦은 나이에 재가를 해서 아들 하나를 낳고 또다시 홀로 되어버린 늙은 시어머니는 단칸방에 들어앉아 품에 있는 손자를 내려놓지 않았다. 진순은 도시의 가장 허드렛일을 하며 양식을 팔아 와야 했다. 까만 탄광촌을 벗어나기만 하면 맑은 하늘 아래서 청량하게 살 수 있을 것이란 영악스런 꿈은 애초에 가지는 것이 아니었다. 까만 어둠은 어디에서나 진순을 놓아주지 않았다. 까만 새벽에 밥을 해 놓고 집을 나서야 했고, 어둠이 까맣게 내려앉은 뒤에야 산동네 언덕길을 지친 몸으로 걸어 올라야 했다. 단칸방 안에도 까만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람 좋은 남편의 허옇게 웃는 얼굴에 까만 어둠이 담겨있었고 방어벽처럼 손자를 안고 있는 늙은 시어머니의 모습에 까만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까만 새벽, 진순은 여섯 살 된 아들의 손을 잡고 열차를 탔다. 열차는 구불텅구불텅 오래오래 달려 처음의 그 자리에 진순을 내려놓았다. 아버지는 앙상하게 오그린 채 바튼 기침을 하고 있었고, 엄마는 갈퀴 손으로 머리를 짚고 연방 긴 한숨을 뱉었다. 방법은 없었다. 기침을 하는 아버지에게 살점을 뜯어내듯 어렵게 모은 얼마간의 돈과 함께 아이를 맡기고 고속버스를 탔다. 고만고만한 직장을 다녀서는 이 까만 어둠으로 부터 평생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이미 깨달은 진순이다. 간병 일을 시작했다. 병원은 냉난방이 되는 쾌적함 속에 잠자리가 해결되었고 삶의 방법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을 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진순이 가진 애초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다. 서른셋, 원하던 대로 돈 많고 나이 많은 남자의 후처가 되었다. 순간순간 천식 발작을 일으키던 남자였다. 아버지의 기침을 수없이 봐 왔던 진순은 기침하는 남자에게 신속하고 정확한 대처를 해 주었고 무엇보다 서른셋, 한참 젊고 한참 이쁠 나이였다. 나이 든 남자는 진순에게 매달렸고 그 가족들은 짐을 덜어버림에 만족했다.
두어 번 해가 바뀌었다. 음흉한 늙은 남자는 혼인신고를 해 주지 않았다. 진순보다 나이가 많은 노인의 자녀들이 결코 혼인신고만은 해 줄 수 없다고 못을 박고 돌아간 얼마 후, 또다시 진순이 원하는 대로 되었다. 남자는 기침을 하다 기침으로 숨이 막혀 죽었다. 노인의 자녀들은 득달같이 달려와 미련 없이 장례를 치렀고 진순은 빈손으로 그 집을 나왔다. 나오는 날, 진순은 씻고 씻고 또 씻었다. 털고 털고 또 털었다. 몸에 남은 노인의 끈적한 손자국이 다 씻겨나가고 다 털려 나갈 때 까지.
진순은 또다시 돌아왔다. 온통 까맣던 곳이 하얗게 변해버린 고향으로 돌아왔다. 폐광이 늘어나며 사람들이 떠나가자 산속 도시는 적막하게 버려졌고 그 버려짐 속에 까만 지붕들은 하얀 지붕으로 변했다. 까만 시냇물도 하얗게 맑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까만 세상에서 절망을 보았던 사람들은 하얀 세상에서도 삶의 끝을 걷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버려진 곳, 하얀 유령 같은 산속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요란한 포클레인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뒤, 성채처럼 규모가 크고 요새처럼 보안이 견고한 커다란 건물이 나타났다. 차들이 몰려들고 돈들이 몰려들었다. 번쩍이는 차에 실려 오는 눈먼 돈을 겨냥한 크고 작은 업체들도 여기저기 들어섰다. 영악한 진순의 눈이 빛났다. 먼저 작은 곳에 발을 담군 진순은 차츰 큰 곳으로 옮겨갔고 마침내 그 번쩍이는 건물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성채 같은 건물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하얀 조리복을 입고 팔 년을 보냈다. 그곳에 중국인들이 몰려들었다. 허드렛일을 하기 위해 조선족들이 몰려들었고, 넘쳐나는 돈을 버리려는 기름 진 한족들도 몰려들었다. 숙소에서는 연변에서 온 열 살 아래의 여자와 함께 지냈다. 여자는 진순을 잘 따랐다. 연변 출신이나 북경에서 유학을 했다는 여자는 유창한 북경어를 구사했다. 시간이 가면서 자연스레 중국어가 들렸고 귀가 열리자 간단한 대화도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진순의 영악함과는 상관없이 그녀의 피폐한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아들을 맡아 키워준다는 명목하에 부모는 끊임없이 돈을 요구했고, 아들이 장성하여 떠나고 나자 늙고 병든 부모는 멀건 눈으로 진순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아버지에 이어 엄마의 상까지 치르고 나자 이번에는 떠났던 아들이 진순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어미를 닮은 머리는 영악했으나, 아비를 닮아 몸이 게으른 아들이었다. 그 아들이 환전소에 돈뭉치를 들이밀고 알록달록한 코인을 되받아 나오는 걸 본 진순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을 떠나왔다. 먼 도시로 옮겨간 옛 동료로부터 젊은 의사 부부의 집에 요리 잘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소식도 마침 들은 참이었다.
‘뭐라! 구십 두 평을 셋이서 서른 평씩 나눠 가지고 나에게는 고작 두 평을 주겠다?’ 진순에게 입주를 제안하던 날, 부엌 옆의 작은 방을 내어주겠다는 윤미의 말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던 진순이었다.
‘암, 이 정도는 되어야지……’ 윤미가 친정에서 자라던 딸 유경을 데려오며 진순은 방을 옮겼다. 서향이긴 하지만 커다란 전면 창이 있고 방도 널찍하다. 게다가 폭넓은 베란다까지 달려있어 족히 여덟 평은 됨직하다. 게다가 유경의 방을 비롯해 아이와 함께 쓰는 공간까지 합치면 스무 평은 될 것이다. 진순의 공간은 점점 넓어져 간다. 뿐만아니라 보이지 않는 깃발, 진순의 깃발이 차근차근 집 안에 꽂혀 나가고 있다.
‘흥, 얄짤없이 새롱거리기는…… 나를 드난꾼으로 시쁘게 여기다가는 큰일 나지. 나라고 당신들을 소외시키지 말란 법이 있더냐고, 푸훗……!’ 가족들은 곧잘 영어로 말하곤 했다. 진순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을 하며 순간순간 웃음을 터트렸다. 못 들은 척 부엌에서 뒷 설거지를 하곤 했지만 그럴 때 마다 진순은 마음이 불편했다. 얼마 후 진순은 유경이와 중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윤미가 일찍 집에 들어온 날 저녁, 진순은 아이를 재우겠다며 책을 들고 유경의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유경의 입에서 커다랗게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국어로.
“아이가 학원을 다니며 체계적으로 배우겠지만 그래도 집에서는 계속 중국어로 대화해 주세요. 그리고 제가 이모님이라 부르면 안 될까요? 아이 교육상으로도 그게 더 좋을 것 같아서요. 유경이도 이모할머니라 부르게 될 거고요.”
유경의 손을 잡고 중국어 학원을 다녀온 날 윤미는 명품가방이 든 쇼핑백을 진순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진순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쁠 것 없는 제안이다. 그리고 이듬해 봄, 간절히 원하던 그 학교에 딸의 입학이 결정되자 윤미는 타던 차를 내주었다. 진순이 추가보수를 받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유경은 미리 배워둔 중국어 덕분에 어렵지 않게 학교에 적응했다. 월요일 아침과 금요일 오후면 이모할머니의 차를 타고 학교를 오갔다. 차 안에서 유경은 즐겁게 깔깔댔고 진순은 아이가 좋아하는 마른 간식들을 가방에 넣어주곤 했다. 그 모습을 본 윤미 부부는 오래 망설이던 일에 용기를 내기로 했다. 유경이 하나 키우는 것도 벅차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일, 바로 유경이 동생을 갖는 일이었다. 더이상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윤미의 나이도 나이려니와 유경이와의 터울도 무시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진순이 함께 있는 이 상황에서 아이를 낳아야 했다. 윤미는 또 의논을 해 왔다. 이번에는 기호도 긴장한 얼굴로 함께 앉았다. 유경이 동생을 낳으면 키워주실 수 있겠냐고, 사례는 충분히 하겠다고. 말없이 듣던 진순은 며칠 생각해 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먼저 일어났다.
‘뭐, 어려울 것 없는 이야기지. 유경이야 기숙학교에 있으니 일주일에 이틀 반 밖에 집에 있지 않을 것이고 갓난아기는 어린이집에서 절반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아이 하나 더 키우는 대가는 암, 당연히 더 받아야지. 이제 갓난아이 방을 비롯해 이 집의 절반 이상은 내 공간이 되겠구만…… 일이 좀 힘들면 청소하는 여자를 하루쯤 더 오게 하면 되는 것이고, 오전에 잠시 왔다 가는 그 여자를 유경 엄마가 알 리는 없고…… 아니 안다고 한들 뭐 어떠랴? 어차피 그 여자 파출 비는 내가 주고 있지 않나.’
며칠이 지난 저녁, 윤미부부는 초조한 얼굴로 진순의 답을 기다렸다. 진순은 말했다. 오래 키워줄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유경에게 동생이 생기는 일이니 힘들어도 일단은 해 보겠노라고. 진순의 말이 끝나자 코끝이 빨개진 윤미가 가방에서 꺼낸 금박봉투를 내밀었다. 유명 연예인들도 많이 간다고 소문이 난 피부관리실의 정기회원권이었다.
“그런데 폴로네이즈를 발음 못하는 것은 또 그렇다고 쳐, 그런데 알파벳대로 읽으면 되는 사 음절 짜리 마주르카를 더듬거리는 것은 너무 하지 않아?”
“공연장이 어둡고 리플렛 글씨가 작으니 제대로 보이지 않아 그랬겠지.”
“아니, 인터미션 때였다니까! 불이 다 들어왔지 그때는…… 그리고 박 여사는 공연 내내 가방만 만지작거리고 있던데? 자기 남편이 어디에서 뭘 연주하고 있었는지나 아나 몰라. 아 진짜, 당신은 잔을 또 그렇게 잡고 있으면 어떻게 해.”
“대충하자 윤미야, 집에서 우리끼리 한잔 하는 데 뭐 어떠냐?”
기호는 커다란 손으로 와 인잔의 몸체를 덥석 잡고 있다. 아내의 면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쥐고 있다. 오히려 다진 베이컨과 야채가 올려진 까나페를 와사삭 소리를 내며 깨문다. 윤미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찡그린다. 그러나 밝은 성격대로 이내 푹하고 웃음을 쏟아낸다. 쥐고 있던 잔을 테이블에 놓은 윤미는 기호의 어깨에 머리를 올린다. 기호의 오른팔이 윤미의 목에 감긴다. 소파에 반 눕듯이 길게 늘여 앉은 윤미의 배가 도도록하다. 아내의 목을 감고 있던 기호의 손이 자연스레 윤미의 배 위로 옮겨간다. 기호의 손 위로 윤미의 두 손이 다가간다.
윤미 부부는 의사들로 구성된 윈드 오케스트라의 정기연주회를 마치고 간단한 뒤풀이까지 끝낸 뒤 조금 전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기호는 연주회의 트럼펫 솔로를 맡아 종횡무진 활약했다. 카라의 각이 반듯이 잡힌 흰 셔츠 위에 검정색 연주복을 입고 황금빛 악기를 연주하는 남편의 모습은 윤미를 설레게 했다. 하늘이 징 하나 만큼 밖에 보이지 않는 첩첩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게 믿기지 않는 모습이다. 기호는 안개를 뿜어내듯 뽀얀 소리로, 혹은 진군하는 병사의 발자국처럼 거침없이 연주했다. 이 기분을 그냥 잠재우고 싶지 않다. 테이블에는 이미 와인이 셋팅 되어 있다. 연두 빛이 살짝 도는 화이트 와인과 가느다란 목 위에 갸름한 계란형의 얼굴이 올려진 창백한 미녀 같은 크리스털 잔 두 개. 그리고 크래커까나페와 보기 좋게 깎인 과일…… 진순이 준비해 둔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미리 준비해 두는 진순의 솜씨다. 진순은 월궁의 제조상궁임에 틀림없다.
잠시 뒤, 부엌에서 조용히 움직이던 진순이 뒷베란다로 나와 몸이 푹 잠기는 흔들의자에 등을 묻고 앉는다. 물끄러미 창밖을 본다. 아니 창에 비치는 윤미 부부의 모습을 지켜본다. 부엌과 베란다의 불을 꺼버린지라 희미한 조명등만 켠 채 거실 소파에 앉아 깔깔대는 부부의 모습이 검은 베란다 창에 거울처럼 비쳐 보인다. 검은 창에 비친 윤미 부부의 모습을 보며 진순은 가만히 웃는다.
‘수술실의 신이면 뭐하고 마취 의사의 전성기면 또 뭘 어쩌겠냐고, 나 없이는 제대로 된 밥 한술 입에 못 넣고, 제 자식도 못 키우는 당신들이…… 아니, 제 자식을 내 허락 하에야 겨우 낳을 수 있는 당신들이…… 신은 나인 게지, 당신들의 조왕이고 당신들의 삼신할미인 내가 신인 것이지…… 풋! ’
콘솔 위에 올려진 하얀 접시 속에 작은 정원이 펼쳐져 있다. 양상추와 무순, 채 썬 양파가 발사믹 소스에 버무려져 있고 깍둑썰기 된 하얀 두부와 꽃송이처럼 말린 오렌지 색 훈제 연어가 군데군데 박혀있다. 하얀 접시 옆에 검은색 와인 병이 밤의 정령처럼 미동도 없이 자리하고 있다.
진순은 베란다 창에 비친 기호의 모습을 한동안 지켜본다. 가만히 웃는다. 진순의 긴 손가락이 검은 와인 병을 잡는다. 밤의 정령은 새빨간 포장지로 목이 감겨있다. 새빨간 목을 비튼다. 새빨간 목은 낮고 격한 비명을 지르며 처참하게 찢어진다. 병을 기울인다. 새빨간 핏물이 떨어진다.
진순은 엄지와 집게, 중지 세 손가락으로 와인대를 살며시 잡고 잔을 가만가만 흔들며 코끝에 갖다 댄다. 찡한 와인 향이 쏘아 든다. 새빨간 액체를 입술 끝으로 빨아들여 천천히 삼킨다. 아이팟의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느리고 웅장한 오르간 소리, 바흐의 파사칼리아 C단조…… 눈을 감은 진순은 천천히 춤을 춘다. 파사칼리아의 느린 템포 속에 우아하게 발을 움직인다. 구십 두 평, 그녀의 아늑한 궁전에서.
2015년 월간문학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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