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성녀에서 마녀까지

yullee kim 2021. 2. 20. 15:31

성녀에서 마녀까지

- 로잘린드 마일스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

 

 

 

나는 두 권의 성서를 가지고 있다. 토지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가 그것이다. 박경리의 토지는 독서의 성서이며 문학의 성서이다. 또 다른 책 로잘린드 마일스의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 는 가치관의 성서로, 내 서재 가장 귀한 자리에 모셔져 있다.

직업 특성상 겨울은 나의 메뚜기 철이다. 밤낮없이 일하고 벚꽃이 필 즈음 풀려나, 한 달쯤 죽은 듯이 쉬다가 몸을 일으키는 곳이 헌책방이다. 8년 전, 헌책방에서 추리, 과학을 중심으로 책을 쓸어 담고 있었다. 그때 얀 베르메르의 우유 따르는 여인이 눈에 확 들어왔다. 좋아하는 바로크풍 그림이다. 그런데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냐고 묻는다. 요리책이거나 최후의 만찬 뒷이야기쯤 되겠지, 그렇다면 전혀 관심 밖인데 하면서도 표지가 마음에 들어 챙겨왔다.

만만한 책을 거의 해치우고 나서 이 책을 열었다. 450페이지나 되는 책이 8, 9포인트의 작은 활자로 빈틈없이 빽빽하게 글자를 담고 있다. 숨이 턱 막혔지만, 까짓것 역사란 무엇인가도 읽었는데 이 책 못 읽으랴.

그 길로 책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연필로 줄을 긋고,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공부하듯 읽었다. 읽는 내내 가슴에 광풍이 불었고, 머릿속 안개가 걷혀갔다. 분노했고, 그 분노의 배경과 원인을 이해했고, 그래서 더 분노했다. 억울했다, 이 억울함을 토로하고 해결할 마땅한 방법이 없어 더 억울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저자가 무엇을 주장하거나 누구를 선동하려는 의도는 없다. 편향되지 않는 역사학자의 시각으로, 원시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여성사를 담담하게 기술한 역사서일 뿐이다. ‘여성은 어떻게 몰락했는가. 종교는 어떻게 여성을 종속시켰는가. 여성의 노동은 어떻게 평가받는가. 여성의 성은 어떻게 인식되었는가. 여성의 교육과 권리는 어떻게 변해왔는가에 대한 지극히 객관적인 서술이다.

이 책에 기술된 방대한 역사와 내가 받은 영향을 제한 된 지면에서 다 말할 수는 없다. 두 가지 관점만 다루어 보려 한다.

 

- 여성의 몰락

원시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남성보다 높았다. 수렵채집 시대라 하나 수렵은 설치류를 비롯한 소동물이나 사체를 얻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제대로 된 무기가 없던 시기라 남자가 완력을 이용해서 큰 짐승을 잡기는 역부족이었다는 말이다. 대신 식량 대부분은 채집으로 충당되었고 채집은 남녀 구분이 없었다. 즉 경제력에서 남녀는 같은 위치에 있었고, 무엇보다 여성은 위치는 여신으로 이해되었다. 51페이지에 이렇게 기술되었다. ‘여성은 의논 상대자, 현명한 자, 지도자, 이야기꾼, 의사, 마술사, 입법자 등의 역할을 맡았음을…… 여성 고유의 생산력과 출산력이라는 신비한 힘 덕분에 초자연적인 권위를 유지했고, 이 특수한 권력을 결코 빼앗기지 않았다. 선사시대 유적들은 모두 부족 내에서 여성이 갖는 특수한 지위를 확인하게 한다.’

남녀의 위치 반전은, 정착농업과 잉태의 비밀이 풀린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농업 즉 힘이 권력이 되는 시대로 돌입하자 여성은 종속되기 시작했고, 생명 생산에서 남성의 역할이 확인되자 여성은 열등한 존재로 전락했다. 이 현상에 쐐기를 박은 것은 종교이다. 115페이지에 엥겔스의 말이 인용된다. “아버지 신이 여성들의 전면적인 패배를 초래했다.”

이 한마디에서 보듯, 남성은 모든 것은 신의 섭리요, 신의 질서라는 지극히 타당하고 지극히 합리적인 방어기제를 찾은 것이다. 기독교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다.” 이로써 남자들은 그들이 행하는 모든 월권에 대한 책임, 착취에 대한 죄의식에서 온전히 벗어났다. 내가 아니라, 숭고한 신의 뜻이며 이 질서가 지켜질 때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 남자의 도피처로 종교만 한 것이 또 있으랴.

사회 곳곳의 남녀차별이 걷혀가는 지금도 종교계는 요지부동이다. 기독교는 극소수 몇몇 교파를 제외하고 여자에게 목사, 장로 안수를 허락하지 않는다. 가톨릭은 더 심하다. 여성은 사제가 아닌 수녀만 허락되는데, 수녀는 신도를 상대로 성경을 가르칠 수 없어 엄밀히 말하면 성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수녀의 일은 성당의 각종 부대업무이고 직렬에 따라서는 사제의 집안일 즉 가정부 업무까지 포함되어 있다.

불교라고 다를까. 천년도 전에 생겼다는 비구니 팔경계법이 아직도 살아남아 백세(百歲)의 비구니라도 처음 수계를 한 비구를 보거든 일어나 절하고 자리를 내어줘 앉도록 해야 한다. 비구니는 보름마다 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하고 외친다. 그렇다고 지금 현시대 비구니들이 이 계를 모두 따르지는 않지만 이 얼마나 노골적인 남성 중심인가. 이슬람은 거론할 가치조차 없다.

 

- 여성의 노동

구십 넘은 엄마와 이야기하던 중, 투정을 조금 했다. 아직까지도 일을 못 벗어나는 내 팔자야, 옛날에는 여자들이 직장 안 다니고 살림만 했으니 세월은 어려워도 살기는 수월했겠다 하였더니 맞벌이 요새 여자만 하는 줄 아나, 옛날에도 다 맞벌이했다. 농사는 일 아니가? 남자는 집에 오면 방에 들어가지만, 여자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하셨다. 맞다. 부르기는 안사람이라고 부르지만 온종일 바깥에서 일한 것도 여자다. 그리고 집에 와서도 노동은 늘 현재진행형이었다.

여자의 노동에 유럽이라고, 오래전부터 문명인이요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는 그들이라고 달랐을까. 여자의 노동에 관하여 로잘린드 마일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남자들이 한 가지 노동을 하는 동안 여자들은 다섯 가지 노동에 종사했다. 남자의 일은 해가 지면 끝나지만, 여자의 일은 끝나는 법이 없다.’ 여기에서 여자들의 일이라는 것이 지극히 여성적인 집안일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에 소개된 16세기 독일 여성의 직업은 남자들이 하는 일 대부분과 동일하다. ‘네제 란트메닌 부인(대장장이), 캐서린 안드레아스(정원사), 캐서린 레베스퇴킨(금세공자), 아그네스 브라우마틴(곡물상인), 엘제 폰 올템베르크(재봉사), 캐서린 하인리히(통 제조업).’

그러나, 이 문명인들이 역사와 예술에서 묘사하는 여자는 늘 다른 모습이다. 우아한 귀부인, 책 읽는 여자, 피크닉 나온 여자, 왈츠 추는 여자. 그리고 그 절정에 나이팅게일이 있다. 나이팅게일은 등불을 든 백의의 천사로 그려진다. 그러나 실상 나이팅게일은 등불 아닌 망치를 들었고, 약품창고를 부셔서라도 필요한 의약품을 챙겨나오는 강단 있는 여성이었다. 또한 원그래프를 최초로 고안한 통계수학의 대가이기도 하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930~60년대 물리학, 의학, 천문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고도 남을 여성들이 자기 이름으로 보고서 한 줄 쓸 수 없었고, 대부분의 연구 결과는 남성 연구자에게 넘겨져 그들의 업적으로 전이되었다. 이렇듯 역사는 오랫동안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여성을 대했다. 필요에 따라 꽃으로, 또는 축생과 다름없는 일꾼으로.

450페이지를 읽으며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살펴보았다. 중세와 근대의 긴 시간 여자는 성녀 아니면 마녀밖에 될 수 없었고 지금도 별다를 건 없다. 자꾸만, 마녀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로잘린드 마일스에게 경외의 박수를 보낸다. 헬렌 레디(Helen Reddy)의 노랫말로 글을 맺는다.(394p)

내가 발끝으로 서는 것을 보아라 / 나는 아름다운 양팔로 대지를 감싼다 / 그러나 내 형제에게 깨달음을 줄 때까지는 /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아주 많이 남은

 

 

 

2020 에세이문학 겨울호 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