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상계리 그 집 두번째 이야기

yullee kim 2019. 3. 9. 23:04

상계리 그 집, 두 번째 이야




한 남자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 여자는 가만히 듣는다. 정물처럼 앉은 여자는 눈을 감는 것으로 주위를 지워버린다. 이제 이 공간 안에는 피아노를 치는 남자와 듣는 여자, 둘만 있을 뿐이다. 남자가 치는 곡은 베토벤 피아노 소타나 14번 달빛이다. 여자는 듣는다. 어떻게, 얼마나 치는가는 평론가들의 몫이다. 여자는 그저 듣는다. 충실하게 듣는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를 들려오는 그대로 본다.

솔도미, 솔도미, 솔도미……. 한 박자로 된 같은 리듬, 같은 멜로디들이 네 마디 이어진다. 왼손은 저음부의 긴 음 두개를 쿵 쿵 무겁게 누른다. 누군가 지팡이를 짚어가며 천천히 걷는다. 한 박자 쉰다. 흠칫, 무얼 발견했나 보다. 소올 솔 소오올, 소올 솔 소오올 그리고 느린 박으로 라 솔 파 시 미. 무엇일까, 조심스레 걸음을 늦춘다. 솔도미 솔도미, 솔레파 솔레파 균일하게 한박자씩 짚어낸다. 궁금하다. 두근두근 심장의 피치가 올라간다.

달밤에 산책을 하던 베토벤이 어느 오막살이 앞에서 피아노 소리를 들었고, 그 소리는 홀어미와 사는 눈먼 소녀의 연주였으며 그에 영감을 받아서 쓴 곡이 월광이라는, 정설인지 야사인지 모를 이야기가 알려져 있지만 굳이 그런 스토리를 동원하지 않아도 이곡의 1악장은 조용한 어디를 누군가 걷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무대 위의 남자는 피아노를 이용해 길을 걷고 있고, 객석의 나는 그런 남자의 모습을 조용히 듣는다.

음악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연주회는 잘 가지 않는다. 음악적 지식도 별로 없고, 소리를 분별해 내는 감각도 턱없이 모자라서 누가 무엇을 어찌 연주하는지 도대체 구별을 못하는 까닭이다. 내가 음악을 듣는 방법은 차에서 듣거나, 컴퓨터나 휴대폰에 음원을 담아서 이어폰으로 듣는 것이 대부분이다. 정말이지 아는 것 없이 그냥 듣는다. 같은 곡을 여러번 듣다 보면 어느 순간 멜로디가 익숙해 질 뿐이다. 누구의 무엇은 어떠하고, 어떤 이의 그것은 저러하다 상세하게 파악하는 이들의 경지는 나와는 다른 세상이고 또 중요하지도 않다. 차의 경우와 비슷하다. 내 입에는 똑같이 씁쓰름한 녹차일 뿐인데 그걸 두고 우전, 세작, 중작 운운하며 맛을 감별해 내는 신통력을 보이는 이들이 더러 있다. 그럴 때면 몰라도 괜찮다. 어차피 차나무 달인 물이니까 하고 훌렁 마셔버리듯이.

9월 25일 피아니스트 ‘권준’의 연주회. 이를 두고 음악을 전공한 지인이 선배의 연주회인데 꽤 들을 만하니 오란다.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서른 두곡 전곡을 연주하는 기획시리즈로 오늘이 그 마지막이니 안 오면 크게 후회할 것이란다. 보내온 팸플릿에도 마지막이라는 메시지가 풀풀 풍긴다. 모두들 잘 아는 월광과 누가 쳐도 잘 치는 것처럼 들리는 21번 발트쉬타인, 마지막 소나타인 32번이 척하니 박혀서는 이래도 오지 않을거냐, 아차하면 나무랄 기세다. 권함 때문인지, 후회가 무서움인지, 기세에 눌렸음인지 여하튼 일을 마친 후 곧바로 금정문화회관으로 달려간다.

달빛, 나는 이 곡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시디나 컴퓨터를 통해서 여러 번 듣긴 했다. 그런데 그 ‘들음’은 시디도 컴퓨터도 아닌, 공연장은 물론 아닌 음악과 상관없는 자리에서였다. 그곳은 글을 쓰는 곳이었다. 수필을 쓰는 이들이 일주일에 한번 모여서 강의도 듣고 합평도 하는 자리였다.

지난해 가을의 어느 밤, B대학 평생교육원의 작은 교실. 환하게 불이 켜진 작은 교실 안에서 한 남자가 글을 읽고 있다. 가만가만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깜깜한 창 밖에는 어린 가을이 삽삽한 바람을 타고 건물 외벽을 주르르고 지나간다. 그 남자의 목소리, 멈칫 멈추었던 가을이 가만히 유리창을 넘겨다본다.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에 귀를 갖다 댄다. 이윽고 창밖에 쭈그리고 앉는다. 마음이 풀려버린 모양이다. 교실 안에서 듣는 나도 풀린다. 가을처럼 풀린다. 마음이 풀리고 귀도 풀린다.

그를 처음 본 것은 두해 전이다.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다. 같이 공부하는 여섯 학기 동안, 그가 결기를 쏟아 내거나 발림수를 놓는 모습 같은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삶을 잘 살아왔음직해 보임에도 우쭐대거나 과시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글은 곧 사람이라더니 그의 글도 그러했다. 본인의 성품처럼 조용하고 진솔하다. 담백하고 잔잔하다. 그렇다고 그의 글이 프로처럼 아주 완벽하다는 것은 아니다. 구조적으로 안정적인 얼개를 짜내거나, 문장의 윤기를 입히는 부분들에서 더러 빈틈을 보이곤 했다. 그러나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멋을 부리거나 사건을 과장하여 부풀리는 허세는 없다. 이런저런 이론을 들이대며 독자를 가르치려는 오만은 더더욱 없다. 그래서 그의 글은 귀를 열게 하고 마음을 열게 했다.

그 글도 그랬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타지에서 하루를 묵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계리 그 집’ 이라는 제목으로 그려냈다. 숙소로 정한 상계리의 그 집은 후미진 곳에 있는 작은 찜질방이다. 뚜벅뚜벅 남자가 걸어간다. 처음 들렀을 때의 따뜻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글쓴이가 일부러 찾아가고 있다. 하지만, 도착해 보니 예전 같지 않다. 손님도 없고 시설도 낡아버렸다. 주인도 늙어버렸다. 게다가 어쩐 일인지 안주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까지 한다. 허허롭기 짝이 없다. 그 허허로운 숙소에서 홀로 잠을 청하는 남자, 삶의 가을에 접어든 남자의 모습이 글 속에서 풀려 나온다. 그런데 그게 서글프거나 외롭거나 우울하지만은 않다. 웬일이지 포슬포슬한 달빛이 가득하다. 홀로 잠드는 남자의 모습이 아늑해 보이기까지 한다. 짜르르…… 토닥토닥, 한발로 갈라진 땅에 성근 비가 지나가듯, 건조한 마음바닥에 무엇이 토도독 떨어진다.

떨어지는 것이 건반을 눌렸나 보다. 소리가 들린다. 느리고 낮은 피아노 소리, 익숙한 멜로디…… 달빛이다. 합평시간, 내 차례가 되었다. ‘읽으시는 걸 듣는 동안 자꾸만 베토벤 소나타 달빛이 들리네요’ 옆에 앉은 동료는 그게 들리느냐 묻는다. 글쎄, 확신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굳이 표현하지면 들리는 것과 느끼는 것의 중간쯤 어디이다. 생각해 보면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과, 느끼는 것은 같은 작용이다. 글을 쓰면서 그려낸다, 그림을 보면서 읽는다, 음악을 들으면서 느낀다라고 표현하지 않는가. 그리고 어떤 창작물이든 그 대상을 통해 무엇을 보거나, 느끼거나, 읽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결과물이다. 더하여 여운이나 향기가 시간을 두고 남아 있을 수 있다면 ‘그 작가의 그 작품’은 성공한 것이다.

상계리 그 집이라는 글 속에 달에 대한 묘사가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일 년이 지난 지금도 상계리 그 집은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내려앉는 달빛이 아슴하고, 그 달빛 속에 저만치 걸어가는 남자의 모습, 한적하고 외진 곳에 자리한 낡은 집, 그것들이 보이고 들린다.

다시 공연장 안, 이곳은 피아노 소리로 가득하다. 사람도 가득하다. 좌석 수가 모자라 벽 앞에 붙어 서서 듣는 이까지 있다. 피아노를 치는 남자는 여전히 달빛 속을 걷고 있다. 점점 사람이 줄어든다. 소리는 점점 나에게 몰려온다. 이제 사람이라고는 연주자와 나 외엔 아무도 없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걸어간다. 달빛 속에서, 상계리 그 집으로…….


2015년 1월 문학의 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