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작가 노트

yullee kim 2015. 3. 20. 20:04

 

작가 노트



겨우내 소똥구리로 살았다. 눈만 뜨면 소똥더미로 달려가는 그 작은 숨붙이처럼 그렇게 살았다. 제 몸집보다 큰 소똥덩어리를 꾸역꾸역 굴려가는 작은 딱정벌레. 그에게는 소똥이 먹이도 되고, 자식 기르는 집도 되는, 세상의 모든 것이다. 내가 그 작은 딱정벌레와 다를 게 무엇이랴. 먹이를 구해야 하고 자식도 길러야 하는 나도 눈만 뜨면 소똥을 주물렀다. 아니 채 눈을 뜨지도 못하고 평균수면시간을 훨씬 못 채우는 상태로 호구를 위한 업에 매달렸다. 일에 지치고 사람에 시달리는 것은 필연이다. 마침내, “아, 밥 벌어 먹는 일의 비루함이여!”가 입에서 흘러나오고 말았다. 게다가 일조량은 턱없이 부족하여 겨우내 우울을 겹겹이 껴입고 살았다.

지면을 받아놓고 마음을 졸였다. 일에 치여, 글을 추려낼 틈이 없었다. 바짝바짝 나감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와중에 기침귀신에 붙들리기까지 했다. 부실한 기관지를 가진 터라 한동안 죽을 듯이 기침을 했다. 그런데, 그 기침 사이로 터져 나오는 말이 “아, 프로글쟁이가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였다. 정말이다. 프로 글쟁이들에게는 글도 소똥더미로 변할 것이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글을 써서 호구를 해결하지 않아도 되는 나는 행복한 자이다. 그리고 문학이 노동보다 가치 있다는 보증이 어디에 있나. 노동이 문학보다 하등하다는 이론이나 증거는 또 어디에 있는가 말이다.


어쩌다 글쟁이가 되었다. 여학교시절, 그 흔하고 숱한 문학소녀 축에도 못 끼던 내가 늦은 나이에 글쟁이가 되었다. 사실, 지금도 문학서적과는 제대로 친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다 읽는 것이라는 게 과학이나 역사책이니 앞으로 제대로 해 나갈지도 못내 걱정이다. 하지만 가끔 생각하곤 했다. ‘사람의 살이’에는 자신도 알 수 없는 패턴이나 설계도가 있을 거라고. 어쩌면 글쟁이 노릇도 그러해서 무당이 신내림을 받듯, 글쟁이도 글내림을 받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팔자에 글이 들어 있으면 언제 어디를 돌아서도 결국은 똑딱똑딱 글자 박는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그렇게 팔자놀음으로 시작한 글이지만, 이제 나에게 글은 천산天山 꼭대기의 호수이다. 하늘이 잠긴 호수이다. 나에게 있어 글은, 우아한 장신구도 아니고, 고상한 취미도 아니며, 호구를 위한 소똥더미도 아니다. 나에게 문학은 신앙이며, 글은 가장 정결한 자세로 임하는 예배행위이다. 그리고 그 신앙과 예배는 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나를 위한 예배행위이며,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자 그 모두의 신앙이다. 그러므로 나는 소똥구리처럼 우직할 것이다. 벅차고 버겁더라도 나의 정신, 나의 살 깎음으로 채워나가고, 글자 한 자, 토씨 한 올까지 오직 나의 것으로만 직조해 나갈 것이다. 그런 문학, 그런 글로 세상 앞에 설 것이다.

어쩌면 세상은 그냥 지나갈 지도 모른다. 쾌속열차라 사정없이 달려 지나갈 지도 모른다. 나는 그 쾌속열차의 소음에 귀가 멍해지고, 날리는 먼지에 시야를 잃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뭐 어떠랴. 열차가 달려가고, 열차 지나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은들 또 어떠랴.


봄이 노크를 시작했다. 봄은 방울새다. 가볍고 재빠르다. 그들이 깃털을 턴 자리마다 순한 채도의 세상이 열린다. 파르름하게, 놀노릇하게, 발그름하게……. 산기슭에, 마을의 담장에 방울새의 흔적이 새겨지면 나의 농번기도 끝이 난다. 소똥더미에서 기어 나와 인적 드문 섬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섬 언덕에 앉아 햇볕을 쪼이며, 한 겹 한 겹 우울을 벗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이것으로 충분한 것 아닌가. 이만하면 기꺼운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어찌 아는가. 혹시 그곳에서 방울새의 고운 꼬리깃이 내 손 끝에 스칠런지도.

 

 

2015 에세이문학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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